25년 6월 디지털자산기본법 발의 이후 원화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면서 국내 기업들은 상표 출원 경쟁에 한창이다. 지난 6월25일 KB국민은행은 ‘KBKRW’를 포함한 무려 17개의 상표권을 출원했다. 같은날 카카오뱅크 역시 ‘BKRW’, ‘KRWB’를 포함한 4개의 상표를 등록하며 참전을 선언했다.
케이뱅크도 지난 7월2일 ‘K-STABLE’이라는 직관적인 명칭과 함께 12건의 상표를 출원하며 디지털 자산 전략을 구체화했다. 이 흐름은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려는 기업들에게 급속도로 번지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표면적으로는 미래 먹거리를 선점하기 위한 기업들의 발 빠른 전략적 행보로 비친다. 그러나 상표권 출원 열풍이 기술적으로 온체인 사기를 방지하는 데 거의 무력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투자자들에게 잘못된 안전 신호를 보내는 위험한 오도 행위가 될 수 있다.
전통적인 금융 시스템에서 상표는 신뢰의 상징이다. 그러나 블록체인과 웹3에서는 투명하게 공개되고 검증 가능한 컨트랙트에서 신뢰의 근간을 두고 있다.
블록체인 위에 올라간 디지털자산은 세 가지 주요 식별자를 가진다. 바로 △토큰의 이름(Name) △티커(Ticker) △컨트랙트 주소(Contract Address)다. 현재 국내 기업이 경쟁적으로 등록하는 것은 이름과 티커 뿐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본질적으로 블록체인 위에서 아무런 고유성을 갖지 못하는 ‘메타데이터’에 불과하다. 이는 사용자의 편의를 위해 존재하는 피상적인 라벨인 것이다. 누구나 새로운 스마트 컨트랙트를 배포하면서 동일한 이름과 티커를 사용할 수 있다.
진정한 식별자는 바로 컨트랙트 주소다. 이는 스마트 컨트랙트가 블록체인 네트워크에 배포될 때 생성되는, 암호학적으로 보장된 고유한 값이다. 블록체인은 오직 이 컨트랙트 주소만을 인식한다. 이를 바탕으로 토큰 전송·예치·스왑 등 모든 상호작용이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KBKRW’라는 이름은 수백 개가 존재할 수 있지만 진짜 KB국민은행이 발행한 스테이블코인의 컨트랙트 주소는 단 하나뿐인 것이다.
상표권은 스캐머를 막지 못한다
국내 기업들이 앞다투어 등록하고 있는 상표권은 온체인 상의 스캠을 막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용자들에게 그릇된 안도감을 심어주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온체인 스캐머들은 기업들이 공들여 쌓아 올린 브랜드 인지도를 역이용하는 데 매우 능숙하다. 이들의 수법은 상표권이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 영역에서 정교하게 이루어진다.
가장 직접적인 방식은 ‘이름만 같은 가짜 코인’을 유통시키는 것이다. 금융감독원은 이미 대형 거래소에 상장된 유명 코인을 시세보다 싸게 판다고 속여, 이름만 동일한 가짜 코인을 판매하고 잠적하는 사기 유형을 경고한 바 있다.
어떤 코인이 출시되기 전에 스캐머는 즉시 똑같은 이름과 티커를 가진 스캠 토큰을 만들어 탈중앙화 거래소(DEX)에 유동성 풀을 생성한다. 그리고 소셜 미디어나 커뮤니티를 통해 “KBKRW 비공개 세일”, “상장 전 저가 매수 기회” 등의 문구로 투자자를 유혹한다. 사용자가 이름만 보고 이 토큰을 구매하는 순간 자산은 회수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
더욱 교묘한 방식은 ‘돼지 도살(Pig Butchering)’이나 ‘로맨스 스캠’과 결합하는 것이다. 스캐머들은 데이팅 앱이나 SNS를 통해 피해자에게 접근해 수개월에 걸쳐 친밀한 관계를 형성한다. 깊은 신뢰가 쌓이면 이들은 “내가 아는 확실한 투자 정보가 있다”며 특정 코인 투자를 권유한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바로 신뢰도 높은 이름을 가진 가짜 스테이블코인이거나 이름만 그럴듯하게 빌려온 가짜 거래소 플랫폼이다. 심지어 스캐머들은 딥페이크 기술로 만든 영상 통화나 위조된 신분증까지 동원하며 피해자를 속인다.
웹2 법망과 능력 밖
이러한 사기가 발생했을 때 한국 특허청에 등록된 상표권이 법적 구제 수단이 될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가장 큰 장애물은 ‘관할권의 부재’다.
상표권과 같은 지식재산권은 본질적으로 특정 국가의 주권이 미치는 영토 내에서만 효력을 발휘한다. 스캐머들은 대부분 해외에 서버를 두고 점조직 형태로 움직이기 때문에 신원 특정이 극히 어렵다.
설령 기적적으로 스캐머의 신원을 파악하더라도 블록체인의 ‘불변성(Immutability)’이라는 기술적 특성이 발목을 잡는다. 한번 블록체인에 배포된 스마트 컨트랙트는 삭제하거나 수정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법원이 ‘가짜 토큰을 네트워크에서 내리라’고 판결해도 이를 강제할 기술적 수단이 없다.
웹3 시대의 신뢰는 어디에서 오는가
대한민국 금융 대기업들의 스테이블코인 상표권 출원 경쟁은 웹3 시대로의 전환기에 나타난 중대한 방향 착오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것이 단순히 ‘의미 없는 경쟁’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는 기업이 상표권에 등록되는 이름을 내세우면 사용자들은 이름에 신뢰의 근간을 두는 웹2적인 착각을 할 수 있다. 사용자들은 복잡한 컨트랙트 주소를 확인하는 대신 자신에게 익숙한 로고와 이름을 찾는 습관을 갖게 될 것이다.
이는 바로 스캐머들이 파놓은 함정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같다. 결국 이 상표권 경쟁은 시스템 전체의 취약성을 높이고 향후 스테이블코인이 본격화되었을 때 대규모 금융 사기를 예방하기 어려워진다.
블록체인 세계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유일한 ‘상표’는 암호학적으로 고유하며 네트워크 전체의 합의에 의해 보호받는 단 하나의 주소, 바로 컨트랙트 주소뿐이다.
블록미디어 / 박현재 기자
원문 : https://www.blockmedia.co.kr/archives/940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