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블록체인 시장은 더 이상 일부 전문가 집단의 틈새시장이 아닌 주요 산업군으로 자리잡았다. PwC는 블록체인 기술이 2030년까지 전 세계 GDP를 1조 7,600억 달러(약 2400조원)까지 증대시킬 잠재력을 가지고 있고 대중적 채택의 결정적 전환점, 즉 ‘티핑 포인트’가 2025년에 도래할 것으로 예측했다. 블록체인 산업은 성장하는 신규 산업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급속도로 몸집을 키우고 있다.
이러한 거대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한국의 현실은 역설적이었다. 기술 강국이자 혁신 허브인 대한민국은 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디지털 경제에서 사실상 관망자에 머물러 있었다. 모호한 규제 환경과 파편화된 법적 체계는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야기했다. 이는 자본, 인재 그리고 혁신이 더 유리한 환경을 찾아 해외로 유출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디지털자산기본법’의 발의를 시작으로 관망자에서 선도자로 전환할 계기가 마련되었다. 해당 법안은 단순한 규제 모음이 아니라, ‘잠자는 웹3 강국’ 한국을 깨우기 위해 준비된 청사진이다.
글로벌 웹3 선두주자, 자본 주도 미국과 규제 기반 싱가포르
한국이 마주한 기회의 규모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미 성공적으로 시장을 구축한 선두 주자들을 먼저 살펴봐야 한다. 미국과 싱가포르는 웹3 경제를 육성하는 데 있어 각기 다른 성공 모델을 제시하며, 성장이란 전략적 정책과 명확한 규제 비전의 직접적인 결과물임을 증명한다.
글로벌 웹3 고용 시장은 폭발적인 성장을 경험한 바 있다. 2023년 이후 전세계 웹3 관련 일자리 공고는 300% 급증했다. 블록체인 개발자와 같은 핵심 직무의 연봉은 12만 달러에서 25만 달러에 달한다. 마케팅과 운영 분야의 비기술 직군 수요 역시 110% 이상 급증했다. 한국이 포착해야 할 산업의 높은 부가가치 특성을 명확히 보여준다.
미국 – 규제 명확성 직전의 자본 주도 혁신
미국은 2030년까지 블록체인 기술을 통해 4,070억 달러(약 560조 원)의 GDP 증대 효과를 누릴 것이라는 장기 전망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 잠재력은 이미 현실의 숫자로 증명되고 있다. 2024년 발표된 혁신을 위한 암호화폐 위원회( Crypto Council for Innovation, CCI)의 최신 보고서에 따르면, 암호화폐 산업은 미국에서 52만 개 이상의 일자리를 지원하고 있고 연간 약 250억 달러(약 34조 원)의 임금을 창출하는 핵심 경제 동력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성장의 중심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벤처캐피털(VC) 생태계가 있었다. 2024년까지 이 분야에 유입된 누적 투자액은 1,200억 달러(약 165조 원)를 넘어섰다. 2021년의 이례적인 투자 열풍 이후 시장이 다소 소강상태에 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a16z와 같은 주요 VC들은 수십억 달러 규모의 펀드를 꾸준히 결성하며 차세대 유니콘 기업 육성에 나서고 있다.
역사적으로 파편화되었던 규제 환경은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지니어스 액트(GENIUS Act)와 같은 법안을 통해 명확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불확실성 해소는 기관 자본이 대규모로 시장에 진입하는 데 필요한 안정성을 제공하기 위해 설계된 전략적 움직임이다.
싱가포르 – 선제적이고 정밀한 규제의 힘
싱가포르는 2024년 헨리 암호화폐 채택 지수(Henley Crypto Adoption Index)에서 1위를 차지하며 세계 최고의 크립토 허브로서의 지위를 공식화했다. 이러한 성공은 ‘혁신은 장려하되, 리스크는 철저히 관리한다’는 싱가포르 통화청(MAS)의 일관되고 정교한 전략의 결과다.
그 중심에는 2019년 선제적으로 도입한 결제서비스법(Payment Services Act)이 있다. 이 법안은 불확실한 규제로 기업을 내모는 대신 ‘디지털 지급 토큰’ 서비스 제공자에게 명확한 라이선스 취득 경로와 자금세탁방지(AML) 의무를 부여하며 신뢰의 기반을 마련했다.
그 결과 싱가포르의 웹3 분야는 전체 핀테크 생태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22년 5%에서 2024년 16%로 3배 이상 급증했고, 현재 싱가포르는 리플(Ripple), 크립토닷컴(Crypto.com), 바이낸스(Binance) 등 수백 개의 글로벌 기업들을 유치했다. 나아가 자산 토큰화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정부 주도 컨소시엄 ‘가디언 프로젝트(Project Guardian)’를 가동하며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중이다.
미국과 싱가포르의 사례는 명확한 규제가 성장의 제약이 아니라 강력한 촉매제임을 보여준다. 규제 명확성은 투기적 시장을 투자 가능한 자산 클래스로 전환시키고 기관 자본을 유치하며 인재와 자본의 해외 유출을 막는다.
기로에 선 한국
현재 국내 블록체인 공급 기업 수는 2023년 기준 472개로, 2022년 대비 15.1% 증가했다. 이는 제한적인 환경 속에서도 자생적인 성장해왔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미국과 싱가포르 생태계의 규모와 비교하면 아직 미미한 수준이다.
두뇌 유출과 인재 부족, 자본 유출과 ‘코리아 디스카운트’
한국 블록체인 산업은 심각한 인재난에 직면해 있다. 향후 5년간 8200명에서 최대 24000명의 신규 인력이 필요할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명확한 경력 경로와 제도적 지원의 부재는 ‘두뇌 유출’로 이어졌고, 뛰어난 개발자와 기업가들은 더 유리한 정책을 가진 국가로 떠나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지난 7년간 “국내 개발 인력의 90%가 떠났다”고 토로할 정도다.
법인 명의의 가상자산 계좌 개설 금지와 ‘1거래소-1은행’ 정책은 심각한 마찰을 유발하며 자본을 해외 거래소와 탈중앙화 금융(DeFi) 플랫폼으로 내몰았다. 한국의 웹3 스타트업들은 규제 리스크로 인해 글로벌 VC들로부터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적용받고 있으며, 자금 조달을 위해 해외에 법인을 설립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지금까지 한국 대기업들의 웹3 사업은 규제 불확실성 속에서 해외 시장을 공략하거나 핵심 사업을 보조하는 대기 상태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번 법안 발의 후 국내 대기업들 또한 웹3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삼성전자: ‘보안’에서 ‘일상’으로, 웹3를 심다
삼성의 전략은 웹3를 별도의 사업이 아닌, 자사 기기 생태계의 인프라로 내재화하는 것이다. AI 시대 수억 개 기기의 연결을 보호하기 위해 블록체인 기반 보안 플랫폼 ‘녹스 매트릭스(Knox Matrix)’를 고도화하고 있다. 동시에 ‘삼성월렛’은 단순한 암호화폐 보관 기능을 넘어서 △디지털 신분증 △티켓 △멤버십 △증권형 토큰(STO)까지 담아내는 ‘디지털 자산의 허브’로 진화하며 대중화의 최전선에 서 있다.
SK텔레콤: ‘복잡성’을 제거한 대중의 지갑, T월렛
2024년 말 출시된 ‘T월렛’은 “웹3는 어렵다”는 편견을 깨는 데 집중했다. 가스비를 회사가 대신 내주거나 복잡한 지갑 주소 대신 소셜 로그인을 사용하는 등 사용자 친화적 정책으로 웹3의 진입장벽을 극적으로 낮췄다. 이는 향후 통신. 구독, 미디어 등 자사의 핵심 서비스와 디지털 자산을 결합하기 위한 거대한 포석으로 보인다.
금융 기관: 디지털 자산 시장의 ‘은행원’으로 나서다
신한은행과 KB국민은행을 필두로 한 주요 은행들은 STO 발행 및 유통 플랫폼을 거의 완성하고 2025년 하반기 서비스 출시를 준비 중이다. 나아가 빅테크의 스테이블코인에 대응하기 위해 은행 공동의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위한 컨소시엄 구성을 본격화하며 디지털 자산 경제의 핵심 인프라 경쟁에 참전한다.
웹3, 한국 내 새로운 가치와 일자리 엔진된다
웹3 산업의 성장이 어떤 분야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지는 미국과 싱가포르의 사례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개발자 위주로 편성되던 초기 산업을 지나 성숙하고 제도의 틀이 잡히면서 이제는 훨씬 더 다채롭고 전문화된 직군들이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코어 엔진: 더욱 정교해진 ‘프로토콜 빌더’
시장의 부침과 관계없이 항상 수요의 최정점에 있는 직군은 단연 ‘블록체인 개발자’다. 하지만 이제 시장이 요구하는 개발자의 모습은 달라졌다. 단순히 DApp(탈중앙화 앱)을 만드는 것 이상으로 금융 시스템의 근간이 될 핵심 프로토콜을 설계하고 대규모 자산을 안전하게 다룰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금융 거래의 속도와 안정성이 중요해 메모리 안전성과 Rust 언어 기반 전문 개발자의 수요는 지금도 초과수요 상태이다. 이들은 시스템 전체를 조망하는 아키텍트의 역할을 요구받는다.
이들의 파트너로 함께 수요가 급증하는 직군이 바로 ‘스마트 컨트랙트 감사관’ 이다. 수조 원의 돈이 오가는 디지털 금고를 관리하고 스마트컨트랙트로 이뤄진 시스템 전체의 보안을 담당한다. 복잡한 암호학적, 경제학적 공격 시나리오까지 예측해야 하므로 개발자 이상의 대우를 받는 경우도 잦다.
새로운 주역: ‘규제’가 만들어낸 전문가 집단
25년 이후 한국 고용시장에는 ‘규제’가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할 것이다. 미국과 싱가포르에서 규제가 명확해지자 △법률 △컴플라이언스 △재무 전문가 수요가 폭발했던 현상이 한국에서도 일어날 것으로 보인다.
STO와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등장은 전통 금융과 기술의 결합을 요구한다. 이제 기업들은 토크노믹스 모델을 설계하고 유동성 전략을 수립할 ‘DeFi 전문가’를 필요로 한다. 이들은 경제학적 통찰력과 데이터 분석 능력을 겸비해야 한다. 또한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들은 준비금을 투명하게 운용하고 외부 감사를 받아야 하므로 CPA 등 회계 지식과 리스크 관리 능력을 갖춘 ‘스테이블코인 준비금 운용/감사’ 전문가를 채용할 것이다.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은 모든 관련 기업에 ‘VASP 컴플라이언스 책임자’ 라는 직책을 사실상 의무화했다. 이들은 자금세탁방지(AML), 고객확인제도(KYC) 등 복잡한 규제 요건을 기업의 시스템에 녹여내고 감독 당국과 소통하는 법률 전문가다. 특히 해외 사업 경험까지 있다면 시장의 최고 인재로 각광받을 수 있다.
삼성, 네이버 등 국내 테크 대기업들이 주목하는 미래는 단순히 ‘웹3’를 넘어 ‘AI와 웹3의 융합’에 있다. AI의 판단을 신뢰할 수 있게 만드는 ‘투명성’과 ‘데이터 주권’을 블록체인 기술로 구현하는 것이다.
블록체인 산업은 기술도 매우 중요하지만 최종 목표는 매스 어돕션인 만큼 사용성도 상당히 중요하다. 블록체인은 인프라 기술에 가깝기 때문에 사용 필요성을 느끼기 쉽지 않은 부분이 있다.
규제 통과 이후 본격적으로 대중을 향한 서비스들이 쏟아질 것이고 기술과 사용자를 잇는 ‘웹3 마케팅/커뮤니티 매니저’ 의 역할도 덩달아 중요해질 것이다. 디스코드, X(트위터), 텔레그램 등에서 강력한 커뮤니티를 구축하고 프로젝트의 가치를 전파하는 일을 한다. 데이터 분석을 통해 캠페인 성과를 측정하고 전략을 수정하는 능력은 필수이다.
글로벌 블록체인 경제는 멈출 수 없는 성장 궤도에 올라섰다. 수년간 한국은 규제 마비로 인해 뒤처져 있었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규제를 토대로 국내 인재와 자본의 유출을 막고 국내 산업 및 금융 핵심들의 잠재력을 활성화하는 데 필요한 확실성을 제공하는 할 필요가 있다.
‘디지털자산기본법’ 시행, 전환점이자 새로운 기회 된다
한국의 웹3 산업은 중요한 전환점을 맞았다. ‘디지털자산기본법’ 시행으로 마침내 사업의 법적 기반이 마련되었고, 시장의 불확실성을 관망하던 국내외 대기업들은 이를 기회로 사업을 본격화할 준비를 마쳤다.
이는 대기업이 보유한 강력한 플랫폼과 규제화된 디지털 자산이 결합하며 만들어낼 시너지를 예고한다. 그 결과 시장은 단순히 개발자뿐만 아니라 금융, 법률, 기획, 마케팅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를 필요로 하는, 보다 성숙한 산업 생태계로 진화하고 있다.
이러한 성장은 과거 한국 시장의 문제점으로 지적되던 ‘두뇌 유출’이나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할 잠재력을 가진다. 결국 산업의 성패는 필요한 인재를 어떻게 확보하고 성장시키느냐에 달려있을 것이다. 새로운 산업의 초기 단계에 다양한 기회가 놓여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블록미디어 / 박현재 기자
원문 : https://www.blockmedia.co.kr/archives/934750